비정상이 정상으로 되기까지
무엇이 맞고 틀린지,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는 애초에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럿이 정상이라고 여기면 비정상도 정상이 되는 것이다. 다만 비정상이 정상으로 여겨지게 되는 과정, 즉 무엇이 어떻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었는지가 의미 있고 중요한 주제라고 본다.
누구든 자신의 사적인 대화, 카메라, 위치, 사진, 인터넷 사용기록 등이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불특정 다수에게 무분별하게 ‘공유’된다고 하면 매우 큰 거부감을 가질 것이다. 공유되지 않는 것이 정상이고, 공유되는 것이 비정상이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놓고 보면, 사람들은 이 비정상에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이와 같은 ‘공유’에 대해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오히려 펄쩍 뛰며 나의 궁금증을 나무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내가 이 ‘공유’에 대해 알고자하는 시도조차 그들은 결사적으로 막았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동안 나는 나의 궁금증에 대해 ’이 이야기를 다른 장소에서나 다른 사람에게 꺼내지 마라’, ‘경찰에 이야기를 해라’, ‘제3자에게 비밀유지 의무가 있는 변호사, 의사에게 이야기해라’, ‘그러한 공유는 불법이다’, ‘신경 쓰지마라’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여러 사람들도 동일한 반응이었다. 그들은 내가 이 비정상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고, ‘공유’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물론 그들도 ‘공유’가 비정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다만 그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이들은 비정상을 안고 아무렇지 않은 듯 정상적으로 생활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이 비정상을 필사적으로 옹호한다는 것이다.
이런 ‘공유’를 명시적으로 언급하면 사람들은 극도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심지어는 매우 불쾌해한다. 그런 비정상적인 일은 절대 있을 수가 없다며 반박한다.
다시 한번, 비정상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옹호한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나의 이러한 의문제기는 지금의 상황이 모두 틀렸고 비정상을 비정상으로 여기던 태초마을로 돌아가서 살아야 한다는 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말 순수하게 기술적인 부분이 궁금한 것이고,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 살고 싶은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러한 침묵의 카르텔에 진입하려는 것을 이렇게까지 참혹하고 야만적으로 막는 심리가 무엇일지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다.
카르텔이라면 원래 진입이 힘든 것이기도 하겠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역설적이고 절망적이게도 아무도 모르다시피, 유독 나에게 이 침묵의 카르텔은 잔인하다. 이 이야기는 다음번에 기회가 닿으면 더 해보려 한다.
원래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기존이라면 당연히 비정상으로 생각할 현상을 사람들이 정상으로 생각하게끔 하고 심지어 필사적으로 옹호하도록 만든 동기가 무엇일까?
시스템? 교육? 사람? 단체? 신념? 관습? 도덕? 법? 경제적 이기심? 소속감에 대한 욕구? 도무지 짐작이 가지를 않는다.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를 아예 정반대편으로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 가까운 이의 도움 요청을 단순히 저버리게 할 뿐 아니라, 그 가까운 이에게 큰 고통을 주는 존재를 아예 옹호하게까지 만든 강력한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보면 의도치 않은 (그랬으면 좋겠다) 유용한 사회실험이었다. 이러한 실험을 통제된 환경에서 계획에 따라 대규모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트루먼 쇼와 같은 세트장을 갖출 수도 없을 것이고, 윤리적 이슈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마치 연령대별로 외국어를 습득하는 속도가 어떻게 다른지 통제된 환경에서 대규모로 실험하는 것은 불가능 했을테지만, 마침 이스라엘이 건국됨에 따라 모든 이스라엘 국민이 히브리어를 새로이 학습하는 이벤트가 존재하여 언어학자들이 그들의 히브리어 학습을 관찰하며 연령대별 언어학습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의 이 현상과 이벤트는 큰 연구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그들의 생각을 바꾸었을까? 비정상은 어떻게 정상이 되었을까?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마저도 누군가가 아주 관심있게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과연 옳게 된 것인지 정말 참담한 심정이다. 혹시나 내가 죽는다면 스스로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 말해둔다. 사회적 살해를 위한 치졸한 계획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더 할 이야기는 없다.